기획전_<눈물은, 진하다>_故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사진전

2009. 7. 10. 06:40세상을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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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사진기자 13명이 지난 5월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정국을 각자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기록한 사진 30여 점이 대학로 갤러리 카페 '포토텔링'에서 전시된다.

전시기간: 7월 10일~ 8월 15일
전시장소: 대학로 갤러리카페 <포토텔링>
문의: 02- 747- 7400(이현석)
phototelling@gmail.com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고영직 | 문학평론가

 민주주의와 삶의 질에 대한 일상적 위협과 공격이 없는 사회는 가능한가? 만일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런 사회를 일러 품위 있는 사회 혹은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리라. 사람 사는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다. 특히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그런 품위 있는 사회에서는 “우리는 서로 다르되, 결코 다르지 않다”는 윤리학이 작동하고 있는가 하면, 인문학적 교양의 가치가 생생히 살아 있는 사회 시스템이 구축된 사회라고 할 수 있으리라.

 노무현,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우리들의 뜨거운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레토릭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 자유와 상상력의 가치를 옹호했고, 모든 차별에 철저히 반대하는 사유와 실천 행위를 통해 ‘아니오’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우리 시대 민주주의와 반권위주의의 독전관(督戰官)이었다. 그날, 그의 영전(靈前) 앞에서, 나와 우리들이 흘린 눈물은 그가 자신을 세상에 적응시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고집스럽게도 세상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 했던 우리들의 ‘바보 영웅’에게 바치는 애도(哀悼)의 눈물이었으리라. 그는 민주주의와 삶의 질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것은 자유에 관한 우리들의 빈곤한 상상력과 허약한 행동주의에 있었으며, 가난에 대한 두려움 자체에 있다는 점을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스스로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가 추구했던 가치의 패배를 스스로 증언함으로써 우리가 품어야 할 희망의 근거는 살아남은 우리들이 새로운 도전을 통해 얻어야 할 몫이라는 점을 역설했던 것은 아닐까.

역사의 천사는 일어나는 일이 곧 역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서거 49재를 맞는 우리들은 일어났던 일은 물론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로써도 늘 새로운 역사를 치열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적 행위가 된다는 점을 이미 깨달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에 무엇을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무언가를 만들어가려는 ‘과정의 정치’가 더 중요하고 또 절실히 요청된다는 점을 자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때 정치라는 말이 우리가 사는 방식, 즉 삶의 형식들을 의미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나와 우리의 삶의 형식들이 더 이상 피동형의 동사들의 목록에 갇히는 신세가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 창조해낸다’는 의미의 주체적․능동적 동사형을 새롭게 나와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점 또한 비로소 이해하고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우리의 현재 모습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의 서거 49재를 맞아 기획된 추모 사진전 <눈물은, 진하다>전은 어쩌면 ‘사람은 결국 무엇으로 사는가?’를 묻고 있는 전시회가 될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유례없는 역사적 사건을 응시하고 관찰하는 사진가들의 앵글은 결코 격렬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죽음을 생각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통렬한 슬픔의 감정교육의 경지로 자연스럽게 연출한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이제 그가 없는 세상에서 나와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자유를 위한 자유의 가치들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한다. 그래서 이 사진전을 보는 내내 나와 우리들은 내 마음에, 당신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에, 질문들이 쌓이고 쌓여 거대한 ‘질문의 무덤’이 자리를 잡게 되는 낯선 감동의 순간과 함께 우리 영혼의 자기 정화의 체험을 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 사진전에서 그날 나와 우리가 흘렸던 눈물들의 성분과 의미에 대해, 그리고 지금 당장 답은 모르더라도 문제를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성찰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날, 나와 우리들의 슬픔과 패배의 기억을 인화(印畵)한 이 사진전 <눈물은, 진하다>전은 만해 한용운 선사가 자신의 불후의 명시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라고 썼던 불멸의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 진하디진한 눈물의 기억을 통해서 나와 우리들은 생각을 나누고, 미래에 대해 새로운 상상력의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그리하여 눈물의 대동(大同) 세상을 넘어, 다시 프로메테우스적 신념을 갖고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실천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잘 가시라, 우리들의 바보 영웅이여. 나와 우리들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


역류의 시대를 뒤로한 채 노무현은 갔다!

 김종길 | 미술평론가

생태적 에스노그라피를 실천하라!

 아수라의 힘은 다시 온 대지로 향하고 있다. 민중을 향한 화염의 비수와 더불어 우리를 경악케 하는 세종로 까쇠들의 대운하 정책은 전국토의 전면적 개토로 이어질 전망이다. 그것은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이래 가장 잔인하게 전개될 대지에 대한 학살일 터이다. 세계의 환경론자들은 문명의 쾌속 질주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돌출시켰으나 오히려 그러한 이성적 판단이 지속적인 개발정책의 자기이념으로 합리화 되었다는 게 근본 생태론자들의 주장이다. 자연에 대한 생태론적 사유에는 이성과 합리적 사유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생명성이 존재한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본뜻은 주체와 객체가 한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는 어떠한 인위적 가해 없이 그 스스로 존립되었고 형상화되었으며, 또한 그 기세와 흐름으로 앞으로도 영구할 것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박정희가 독일 아우토반의 무한 질주 개념을 흉내 내어 경부고속도로를 직선의 폭력으로 뚫어 버렸듯이 MB정부는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카르텔을 하나의 아비투스habitus로 형성시켜 대운하를 위한 대중설교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박정희의 폭력을 내면화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MB정부의 그런 개념 활용을 알면 뒤로 넘어가겠지만, MB정부가 상상하는 에코토피아 대한민국에는 그래서 생태적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이 지닌 최소한의 공공성이나 역사적 기억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이 “고구려, 신라, 백제, 마한이 융성했던 이 강의 생명력으로 국운을 일으키자”고 떠벌리는 것은 모순의 구토이다. 대운하를 위한 비밀조직을 운영하면서 양심선언 연구자를 징계하는 이들의 태도에는 사회적 합의나 미래세대에 대한 역사적 책임보다 한 권력자의 탐욕만을 충족시키려는 복종의 패거리 의식만 엿보인다.

 이 땅은 부정한 그들이 언급했듯이 한민족의 역사가 골골에 새겨진 거대한 생명이다. 이 땅 어디에도 그 숨결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 민족의 예술 미학은 그 근본부터 자연 미학의 본류를 흠모했고, 숱한 예술가들이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 예술적 고투를 마다하지 않았다. 역사가들 또한 사기史記의 첫 페이지를 자연과 인간이 혼융된 신화적 판타지로 기록했던 것은 그 뿌리가 대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인간의 삶은 둘로 분리될 수 없으며,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거나 해서도 안 된다. 이 구도가 조금씩 붕괴된 것은 인간이 자연의 신성을 밀어내면서 획득한 근대에 있다. 인간의 발과 수레로 새겼던 실크로드는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의해 ‘국도’로 확장 개발되었고, 그 길은 침략과 약탈, 전쟁의 아우성을 실어 날랐다. 근대화 도시화 현대화에서 속도전으로 치달았던 ‘도로’는 문명이라는 괴물을 성장시켜 온 최대의 공신일 것이다. 이 정부의 모태신앙은 그런 현대화의 부조리와 헤게모니가 강력하게 응결된 독선에 있다. 유구무언이랬다. 그들은 유구한 이 땅의 역사 앞에서 녹색이니 청정에너지니, eco따위의 미사여구를 내뱉을 자격이 없다. 이 땅은 반역자들의 영토가 아니다!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나 우파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이나 정권을 잡은 권력자들이 하는 일이란 온갖 난개발을 통한 파괴의 정치뿐이다. 자본주의 도시문명의 확장을 위대한 선진화의 척도로 내세우면서 ‘생태도시’ ‘휴먼시아’ ‘명품도시’를 부르짖고, 녹색뉴딜정책이 정권의 미래비전이라면서 수 십 조원을 퍼 붇겠다는 토건국가의 유토피아를 설교해 온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똑 같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새만금 간척사업, 서귀포 해군기지, 천성산 터널, 시화호, 행정복합도시에서 경인운하까지 죽임의 정책과 집행은 계속되고 있지 아니한가! 좌우 이데올로기 정체성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정치는 진실의 실체에 다가 설 수 없다!

 토건국가를 넘어서 ‘돌봄 사회’로 가자고 주장하는 조한혜정은 『다시, 마을이다』(2007)에서 아이들이 행복하게 ‘서식’하는 생태계를 소망하며, 그것이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 찾고 있다. 그는 한국사회가 온통 ‘건설의 덫’에 걸려 있다고 진단하면서 배려와 돌봄과 신뢰와 사랑의 공간이 안정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고 통박한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인류의 대안문명을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황량한 마을 라다크에서 찾지 않았던가. 라다크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고, 긴밀한 가족 공동체적 삶속에서 사람들이 정서적․심리적으로 안정을 누리며, 여성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존경받는 사회”이다. 호지는 마천루가 즐비한 뉴욕이나 동경, 런던과 서울의 도시 문명이 미래문명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도시는 근원적으로 반생태적 가치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우정과 환대를 비켜서는 이율배반의 고립지대를 형성한다. 만약 정부가 근원적이며 본래적인 태도로 생명의 생태도시를 지향한다면, 과시와 업적의 유통기한을 위한 불도저식 개발욕망을 내리고 공동체의 생태적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도 멀어 보인다.

 이 역류의 시대를 뒤로한 채 노무현은 갔다. 죽임의 굿판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몸을 던져 일깨웠다. 아수라의 까쇠들이 부활해 판을 휘몰아 가는 파시즘의 바람을 우리는 맞고 있다.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은 리얼하다.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는 언제쯤 도래할 것인가? 그러나 희망을 버릴 수 없다. 그를 보내면서 흘린 눈물이 진한 이유는 바로 그 희망 때문이다. 총칼의 혁명이 아니라 자유의 숨결로 변화시킬 우리의 현재가, 그리고 내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물은 진하다. 아니, 우리의 피가 진하다.

위험한 것들이 흐른다

심장이 며칠째 먹통이다
피를 들이쉬고 내 뿜는 것 외에는
일체 통신두절이다

아이들조차도
화를 부르는 이 짐승의 기능을
월경하지 못한다

그의 죽음으로
가슴은 황폐해졌고
심장은 이성을 잃었다

자칫 나는 내 몸의 주인을
버릴까, 하는 생각으로 살았다

나를 내 안에 연금시키는 일조차
좀처럼 쉽지 않았다

야간을 틈 타
허기진 눈빛으로
그의 피 묻은 옷을 좇는다
발목 등산화 한쪽을 갈기갈기 물어뜯으며
마지막 결행 직전의 향취를 먹어치운다

양심의 썩은 악취나 발 냄새 따위는
없다, 신자유주의나 제왕의 육질을 찾는
이빨은 간사했고, 민주주의와 진보를
핥는 것도 부끄럽다, 거기맨 발의 시대만 있었다

봉화산 부엉이 바위는 위험하다

새가 날아와 심장에 꽂히면
가슴도 떨어진다, 불온한
상상은 위험한 거야

들꽃은
산들바람은
새벽이슬은
소나무는 위험해
그것들은
위험해, 라고
말한다

금지하지 않은
저 모든 것을
금지하는 것
불온하다

새벽이 울고 있다
부엉이 통신이다, 심장이
그 소리에 터진다

어둠을 뚫고 흐른다
위험한 것들이 녹아

고동친다, 내 피가 위험해